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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따


이스와란의 기따 5-6장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17-05-31 20:17     조회 131


    제5장
    버리고 기뻐하라

      이 장의 시작 부분에, 영적 삶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즉 “세상을 떠나는 것”, 직업과 가족의 일상사로부터 물러나는 것은 초연detachment을 가지고 세상에서 일하는 것과 대조를 보인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는 산야사 즉 “포기”이다. 전통적으로 산야사는 모든 세상의 구속과 집착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산야사의 서약을 한 사람은 집, 가족, 직업을 떠나 엄격한 사색contemplative의 삶을 추구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인도에서도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전통 사회에서의 놀랄 만한 수의 사람들이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떨어진 수도자의 삶을 택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도에서 자비로운 붓다는 참나 깨달음의 외로운 길을 찾기 위해 가정의 위안과 성취, 그리고 세상의 삶을 떠난 사람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 이야기는 아시아 전역에서 잘 알려져 있다. 싯다르타 고따마는 모든 세상의 만족감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왕자였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을 초월하는 세계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궁을 떠났다. 그는 방랑하는 산야시, 즉 외로운 소박한 수도승이 되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그는 사회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니르바나의 평화를 가르쳤다.
     이 산야사의 방법이 목표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크리슈나가 여기서 인정하긴 하지만 그는 이기심 없는 행동 즉 이기심 없는 봉사의 길을 더 나은 방법으로 추천한다. 그는 샹끼야의 길을 여기서 행동의 길을 의미하는 요가의 길과 대비시킨다. 이 맥락에서는 샹끼야는 일반적으로 참나의 지식을 의미한다.  요가라는 용어는 기따에서는 정의하기 어려움을 나타낸다. 이는 요가가 여러 경우에  여러 것들을 의미하며, 이 만능의 용어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들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장들에서 논의 중인 주제는 적극적인 영적 삶, 즉 까르마 요가였다. 그것이 분명 이 맥락에서 의미되는 바이다. 샹끼야와 요가는 또한 “이론과 실천”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기따의 시대에는 지혜의 길이 높이 평가된 반면 행동의 길은 영적 삶의 불순물adulteration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심지어 기따가 까르마 요가를 참나 지식 추구와 접목시키는 숭고한 개념을 도입한 첫 번째 힌두 경전이었을 수도 있다. 크리슈나는 오직 미숙하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만이 지식의 길과 행동의 길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동의 진짜 목표는 참나에 대한 지식이다. 둘 중 어떤 길이든 충실히 따라가면 완벽한 영적 비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까르마 요가에서는 이기적인 자아가 일로부터 만족감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일과 이기적인 연관이 없을 때, 일하는 사람은 영적 불행을 겪지 않는다. 그 예는 연꽃이다. 그것은 물에 떠서 그 생애를 보내지만 물방울은 잎을 전혀 적시지 않고 굴러 떨러진다. 이와 비슷하게 까르마 요가 수행자들이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지 않는 한 그들을 더럽힐 수 있는 어떤 악도 매달릴 곳이 없다. 그런 요가 수행자들은 그들 행동의 결과나 결실(까르마 빨라)에는 무심하다고들 말한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성공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일하는 삶은 참나 지식이 없으면 성취감을 줄 수 없다고 경고한다. 결국 그 안에 있는 진정한 참나는 좋든 나쁘든 그가 하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새벽에 태양처럼 떠오르는 참나에 대한 지식만이 그의 삶의 목적을 충족시켜줄 수 있고, 재탄생 너머로 그를 나아가게 한다. 
      참나 즉 아뜨만에 대한 이 지식은 그 특성상 또한 어디에나 만연해 있고 편재하고 초월적인 신, 브람만에 대한 지식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모든 존재에게서 이 신성한 본질을 본다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그 또는 그녀는 “평등한 비전”을 가지며 그리고 외적인 측면에 관계없이 모든 것 안에서 신성한 참나를 본다.
      이 장의 마지막 세 개의 시들은 사마디라고 불리는 심오한 명상 상태를 묘사한다. 명상이 아주 깊어지면 호흡은 느려지고 안정되고 고르게 되며 감각의 창들은 모든 외부 감각에 대해 문을 닫는다. 다음에는 마음의 기능이 평소의 광분한 활동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며 평정을 되찾는다. 욕망, 두려움, 분노의 원초적 정서도 가라앉는다. 이런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물결이 흐르기를 멈추면, 영은 적어도 당분간은 자유롭다. 묵따mukta. 그것은 사마디라고 불리는 상태에 들어섰다.
      사마디는 오고 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오랜 기간의 명상과 수년 동안의 열렬한 노력 후에만 들어가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시(5:28)는 중요한 단어 사다sada, “항상”을 덧붙인다. 일단 이 깊은 집중의 상태에 자리를 잡는 사람은 영적 자유 즉 목샤에서 영원히 산다. 이것은 극히 드물다. 동양 뿐 아니라 서양 신비주의자들은 단일성unity에 대한 잠깐의 경험은 얻었지만, 그곳이 원래 살던 곳인 것 마냥 그 안에서 영원히 거했다고 일컬어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아빌라의 성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고 할 수 있다. 힌두 전통에는 알려지지 않은 우빠니샤드의 기록자들로부터 붓다, 샹까라, 그리고 미이라를 거쳐 라마크리슈나와 라마나 마하리쉬에 이르기까지 실재 또는 신과의 이 통합unity의 본성에 대한 것을 전하려고 노력해온 성자와 신비주의자들의 긴 계보가 있다. 
    - D.M


    5. 포기와 기쁨


    아르주나가 말했다.
    1. 오, 크리슈나시여! 당신은 먼저 저에게 일의 포기를 요청하시고 그 다음에는 헌신적으로 일을 할 것을 추천하십니다. 이제 어느 것이 더 유익한지 분명하게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크리슈나
    2. 일의 포기와 까르마 요가 둘 다 자유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둘 중, 까르마 요가가 일의 포기보다 더 낫습니다.

    3. 싫어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상반되는 쌍들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항상 포기하고 있는 자로  아십시오. 그는 쉽게 굴레로부터 해방됩니다. 아르주나.
    4. 지식의 길인 갸나 요가와 이기심 없는 행위의 길인 까르마 요가가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어느 하나에 바르게 헌신하는 사람은 둘의 결과를 얻습니다.
    5. 포기의 사람들이 이르는 상태는 행위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얻어질 수 있습니다. 포기의 길과 행위의 길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바르게 보고 있습니다.
    6. 아르주나, 행위의 포기는 행위의 이행 없이는 이르기 어렵습니다. 행위의 헌신으로 정화된 현자는 빠르게 브람만에 이릅니다.

    7. 까르마 요가에 헌신하며, 마음이 아주 순수하며, 자기를 정복하였으며, 감각을 억제하였으며, 자신의 참나(신성한 의식)가 모든 존재들의 참나임을 깨달은 사람은 행위를 해도 오염되지 않습니다.

    8. 진리를 아는(신성한 의식에 있는) 사람은 물질적 감각이 물질적 대상에 관여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것들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항상 알기에, 비록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먹고, 걷고, 자고, 숨 쉬고,
    9. 말하거나, 놓아주거나 붙잡거나, 심지어 눈을 뜨거나 감을 때조차도, 자신은 행위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0.  집착이 없이 행위를 하며 행위의 결과를 신(무한자)에게 마치며 집착이 없이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연잎이 물에 닿지 않고 있듯이, 죄에 물들지 않습니다.
    11. 집착을 버린 요기들은 몸, 마음, 지성, 감각들조차도 오직 정화를 위하여 행위를 합니다.
    12. 자신의 행위의 결실을 꾸준히 버린 사심이 없는 요기는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심이 있고 욕망에 이끌린 사람은 결실에 집착하여 묶입니다.
    13. 자신의 감각들을 가라앉혔고, 마음으로 자신의 행위의 결실을 포기한 영혼은 훈련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홉 문이 있는 도시에서 행복하게 거주하는 참나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행위를 하거나 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14. 지고한 영/참나/신은 행위자를 창조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로 하여금 이런 저런 행위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행위의 결실과의 연합도 만들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쁘라끄리띠)이 합니다.
    15. 신은 사람의 악행이나 선행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식이 무지에 감싸일 때 즉 자신이 자연과 동일시 할 때 묶입니다.



    16. 그러나 무지가 참나 지식에 의하여 파괴될 때, 지식은 태양처럼 지고한 브람만을 드러나게 합니다.
    17. 그들의 생각은 그것(영, 브람만)에 잠기며,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것에 자리를 잡으며, 그것만이 자신의 목표인 사람은 지식으로 죄가 사라져, 결코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갑니다.
    18. 모든 곳에서 오직 참나를 보기 때문에 그들은 동등한 시각을 갖습니다. 학식이 있고 겸손을 구비한 브람마나, 소, 코끼리, 개  혹은 카스트 바깥에 있는 사람을 동등한 시선으로 봅니다.  19. 모든 존재들에서 같은 순수한 브람만을 보는 마음에 자리 잡은 사람은 탄생과 죽음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브람만처럼 오점이 없으며, 그래서 그는 항상 브람만 안에 있습니다. 20. 절대자(브람만, 영혼)를 알며, 브람만에 자를 잡으며, 지식이 확고하며, 미혹이 없는 사람은 바람직한 것을 경험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경험하여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21. 감각의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는 참나에 내재하고 있는 늘 새로운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그 사람이 브람만(절대자, 참나)에 대한 깊은 명상 속으로 뛰어든다면, 그는 중단이 없는 희열을 느낄 것입니다. 
    22. 아르주나, 감각 대상들과의 접촉으로 오는 즐거움은 시작과 끝이 있으며, 고통의 원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오고 가는 쾌락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23. 인간의 몸으로 있는 동안에, 만약 그대가 욕망과 화의 충동을 견뎌 낼 수 있다면, 그는 요기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24. (욕망과 화의 통제만으로 해방을 오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에서 행복하고, 안에서 기뻐하고, 안에서 빛나는 요기는 절대적 자유 혹은 목샤를 얻습니다. 그 자신이 브람만이 됩니다.
    25. 이원성과 의심 너머에 있으며, 감각이 통제되었으며, 항상 모든 존재들의 안녕에 헌신하며, 죄가 없는 사람은 절대적 자유 즉 목샤를 얻습니다. 
     26. 욕망과 화를 벗어버렸으며, 생각이 통제되고 있으며, 참나를 아는 고행자에게 브람만의 희열이 모든 곳에 있습니다. 
    27. 모든 감각 대상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눈과 마음을 미간에 집중하며, 코를 통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을 갖게 하며,
    28. 감각과 마음과 지성을 늘 통제하며, 해방을 자신의 최고의 목표로 가지며, 욕망과 두려움과 화에서 자유로운 현자는 완전한 해방을 경험합니다/얻습니다.
    29. 나를 얏나와 고행을 즐기는 자로, 모든 우주의 주인으로, 모든 존재들의 친구로 아는 사람은 평화를 얻습니다.

    제6장
    명상의 수련

      이 장은 분명 기따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비전문가에게 들려주는 명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여기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명상 기술들이 빠딴잘리의 요가 수뜨라 같은 조금 더 난해한 글로 제시되지만 기따는 불필요한 신비나 복잡함 없이 그것을 더 간단하게 표현한다.
      이 장은 또한 “진정한 요가 수행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이 요가 수행자(요기yogi)라는 단어는 자기 몸을 기묘하게 비트는 놀라운 사람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다. 요가 수행자들은 여전히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늘방석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육체적인 수행이나 자세와 관련한 종류의 요가 전문가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바늘방석에 눕거나 심지어 산 채로 묻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놀랄 만한 위업을 이룬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힘의 요가” 즉 하따 요가라고 불리는 요가의 이런 육체적인 면은 기따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육체적인 기술이 존재한다 해도, 기따는 그런 것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정상적인 영적 발전 과정의 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기따에서 요기라는 단어는 보통 더 겸손한 정의를 가진다. 그것은 보상에 대한 초연detachment으로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다(6:1). 또는 “명상의 목표를 손에 넣은 이”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요기는 문자 그대로 “요가 안에서 성취한 자”이다.  요가는 “영의 통합integration of the spirit”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가는 완전함 또는 가장 깊은 영적 수준에서 완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요가라는 단어는 또한 종종 빠딴잘리가 가르친 명상 수행인 라자 요가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는 명상이 자신의 가장 참되고 깊은 참나와 통합되고 합일되는 직접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요가 수행자는 명상에 능숙한 자이다.
      지금까지 크리슈나는 적극적 봉사의 삶, 즉 까르마 요가에 대한 필요에서 아르주나를 가르쳐오고 있었다. 이제 크리슈나는 영적인 삶에 대한 더 내적인 수련법의 수행의 기초를 그에게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 까르마 요가는 참나 깨달음의 산을 오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미 정상에 오른 자들에게 그 길은 명상contemplation의 평온인 샤마shama이다. 영적인 삶을 시작할 때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정상이 가까워지면 그 등반이 더 쉬워지지는 않아도 명상contemplation이나 고요함의 규모가 더해진다. 물론 많은 영적 전통들은 종교적 탐색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이미지를 사용한다. 산꼭대기는 모세와 같은 신성한 이가 신과 교감하는 곳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카르멜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산을 오를 때는 의지력, 자조self help, 그리고 치열한 개인적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5번 시를 직역하면 “사람은 참나에 의해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이다. 아뜨만에 대한 언어유희로 일반적 의미에서의 자아 뿐 아니라 가장 높은 참나를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자아는 그의 친구 또는 그 자신의 적이다. “낮은 자아”는 자기 의지, 부정적이고 이기적 의미에서의 의지이다. 자기 권력 강화를 향해 비틀린 제멋대로의 의지는 가장 심각하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곳인 요새 바로 안에 숨어 있는 적이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스스로를 정복한” 이들은 참나 안에서 진정한 친구를 가진다. “자기 정복을 한” 성실한 자기 수련을 가진 사람만이 평온하게 산다.
      이들이 진정한 요가 수행자들이라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그들은 어떤 악의를 품을 수도 없고 심지어 누군가를 적으로 보려는 마음이 들 수도 없다. 그들은 “차분한 마음을 가진” 사마붓디samabuddhi이다. 모든 단계의 의식에서 완전히 통합된 진정한 요가 수행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느낀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모든 존재에서 참나를 본다.
      이런 자기 정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아주 단순하게 기따는 마음이 명상의 수련을 통해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기본 기술이다. 기따에서 우리는 때때로 힌두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의식과 신비를 위한, 정교함을 위한 경향을 볼 수 없다. 먼저 크리슈나는 단순히 아르주나에게 명상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수련에 적합한 장소는 깨끗하고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전통에 찬성해서, 한 시는 명상 자리는 꾸샤 풀과 사슴 가죽으로 덮여 있을 것을 추천한다. 요가 수행자의 전통적 자리.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명상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아니라,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명상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완전히 집중시키기 위한 내적 수련법이다.
      둘째, 크리슈나는 몸, 머리, 그리고 목을 일직선으로 세우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비전(秘傳)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용적인 목적이 있다. 요가의 비틀기 학파 참조하라. 척주를 세우고 똑바로 앉는 것은 졸음을 물리친다. 또한 명상의 고급 단계에서 그것은 활력 즉 꾼달리니를 자유롭게 흐르게 해 준다.
      그런 다음 실제적인 충고가 주어진다. 절제가 길이다. 극단적 금욕주의asceticism와 사치, 그 어느 것도 명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힌두 문화에 대한 처음 지식은 그것이 까마 수뜨라의 관능이나 은둔자의 금욕 중 어떤 것을 조장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우리가 인도 문명에서 많은 표현 즉 그림, 조각, 음악, 그리고 춤에서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것의 발달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인도 요리는 그 다양한 풍미와 향신료로 유명하다. 인도는 또한 방랑하는 성자나 사두의 금욕적인 검소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기따는 중도를 권한다. 너무 많이 먹거나 자는 이들, 너무 적게 먹거나 자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명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육체는 너무 하고 싶은 대로 놔두어서도 안 되고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서도 안 된다. 붓다도 같은 것을 권했다.
      이 장에는 마음을 한결같은 불길에 비유한 유명한 시(6:19)가 있다. 그 본성상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그 욕망을 이루려고 애쓰면서 계속해서 여기 저기 방황한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것은 폭풍우 속의 불길과도 같이 걷잡을 수 없이 깜빡 거린다. 결코 완전히 꺼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마음이 산만해질 때마다 그것은 그것의 근원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그것은 참나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단 그것이 명상의 한 가운데에서 편안하면 마음은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 똑바로 서서 깜빡거리지 않는 불길처럼 안정된다. 오직 이 깊은 명상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성취감을 발견한다. 그러면 “고요한 마음이 브람만에 닿고 희열을 누립니다.”
      이제 아르주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크리슈나는 그보다 훨씬 앞에 있고 기를 쓰는 제자는 그저 따라갈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저의 마음은 너무나 쉬지 못하고 불안정해서 당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신비한 평화의 상태에 대한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아주 강력하고 심하게 요동쳐서 그것을 자제시키려고 하는 것은 바람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크리슈나는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초연detachment을 가진다면, 규칙적인 수행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여기서 아르주나를 돕기를 제안하지 않은 것은 흥미롭다. 그것은 뒤에 나올 것이다. 현재로는 그는 아르주나에게 은밀하고 개인적인 원동력에서 나온 고된 일과 무심함detach을 통해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아르주나는 상당히 놀라운 질문을 한다. 영적 목표는 믿지만 그것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의 더 강력한 강박적인 욕망중의 하나가,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듯이 그의 결심을 흐트러뜨리면서 그를 집어삼킨다면 어떻게 될까? 아르주나는 참나 깨달음을 추구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만약 시도한다 해도 왠지 실패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만약 그가 실패한다면 모든 것, 즉 자기 충족의 목표 뿐 아니라 세상 삶에서 그가 포기했던 모든 것을 잃을 것인지 그는 묻는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그의 영적 상태를 개선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헛된 노력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애정을 담아 확언한다. 심지어 다음 생을 내다볼 때도 득을 볼 뿐 잃을 것은 없다. 그는 중단했던 탐구를 시작하기에 알맞은 가정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다음 생에 그는 다시 한 번 영적 목표에 끌리게 될 것이고 유리하게 출발할 것이다.
    - D.M.


    6. 명상의 수련/요가

    크리슈나
    1. 행위의 결실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사람이 산야신이자 까르마 요기이지, 신성한 불을 피우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2. 그들이 산야사라 부르는 것이 까르마 요가임을 아십시오. 아르주나, 행위 뒤에 있는 개인적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까르마 요기가 되지 못합니다.

    3. 명상의 요가에 이르기 위해서는 까르마 요가가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 상태에 이른 사람에게는 마음의 평온/고요(사마)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합니다. 
     
    4. 감각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과 일의 결실에 대한 집착이 없으며, 모든 개인적인 이기적 동기를 버린 사람을 생각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요가적 완성, 요가루다)을이라 합니다. 

    5.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하여 자신을 향상시키도록 해야지 떨어뜨리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6. 마음은 그것을 통제한 사람에게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적처럼 행위를 합니다. 

    7. 마음을 통제한 사람은 더위와 추위, 즐거움과 괴로움, 명예와 불명예에서 고요합니다. 이제 그는 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8. 지식과 깨달음으로 만족하며, 차분하며, 마음과 감각을 정복하였으며, 흙, 돌 혹은 금덩어리를 동일한 시각으로 보는 요기는 참나를 깨달았습니다. 

    9. 친구, 동반자, 적, 무관심한 사람, 중립적인 사람, 혐오스러운 사람, 친척, 성자, 죄인에 대해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은 뛰어납니다. 

    10. 고요한 곳에 홀로 앉은 요기는 마음과 감각들을 통제하고, 희망이나 갈망이나 탐욕이 없이, 몸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물을 지닌 채 계속해서 지고한 존재/참나/명상의 대상)를 명상해야 합니다.
    11. 요기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깨끗한 장소에 신성한 꾸샤 풀 위에 사슴 가죽, 그 위에 천을 놓은 자신의 확고한 자리를 마련한 뒤 앉아야 합니다.
    12. 그 자리에 앉으면 생각과 감각들의 활동을 통제하면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 요기는 자기 정화를 위한 명상을 합니다.

    13. 허리, 척추, 가슴, 목과 머리를 바로 세우고 움직임이 없으며 견고하게 한 채,  다른 곳을 보지 않고 눈과 마음을 미간에 응시합니다.
    14. 고요한 마음과 두려움 없이, 브람마짜리야의 맹세에 확고하며, 마음을 통제하고, 마음의 균형을 이룬 그는 자신의 지고한 목표로 신을/나를 가진 채 앉아야 합니다.
    15. 이런 식으로 항상 마음을 브람만에 고정시킴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요기는 나와 하나됨으로  브람만 니르바나의 평화를 얻습니다. 그것이 궁극의 해방입니다.
    16. 아르주나, 먹는 것이나 자는 데서 너무 적거나 많으면, 이 명상의 요가는 불가능합니다. 
    17. 그러나 음식과 휴식, 일, 수면과 깨어있음 이 적절한 사람에게, 이 명상의 요가는 모든 슬픔을 파괴합니다,
    18. 완전하게 통제된 마음이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채 오로지 브람만/참나 안에 몰입했을 때, 그는 브람만/참나과 연합되었다고 말해집니다. 
    19. 참나에 집중을 수행하고 있는 요기의 훈련된 마음은 바람이 없는 곳에 있는 불꽃과 같습니다.
    20. 명상 수행으로 훈련된 마음이 고요을 얻어 자신이 참나를 볼 때, 그는 자기 자신의 참나에 만족합니다.


    21. 감각 지각의 너머에 있으며, 순수한 지성에 의해 알려질 수 있는 이 절대적 희열을 인식하고/느껴 그것에 뿌리를 내리는 사람은 자신에 관한 진리/실재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22. 이것을 얻으면, 그는 이것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자리를 잡으면, 큰 슬픔조차도 그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23. 고통과의 연합의 단절을 요가로 아십시오. 이 요가는 확고하게 그리고 어떤 의심도 없는 불굴의 의지로 수행해야 합니다.
    24. 모든 이기적 욕망을 완전히 버리십시오. 마음으로 감각대상으로부터 감각을 완전히 불러들이십시오.
    25. 확고부동한 지성으로 점차로 마음을 고요하게 합니다. 마음은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참나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26. 무슨 이유로 변덕스럽고 쉬지 않는 마음이 훌쩍 떠날 때마다, 요기는 그와 같은 주의산만으로부터 마음을 데려와 참나의 통제에만 있도록 하십시오. 
    27. 마음이 완벽하게 고요하며, 열정적인 성품이 고요해졌으며, 모든 오점이 없으며/모든 불순물이 파괴되었으며, 참나 지식을 얻은/브람만과 하나가 된 명상가에게 지고한(영원한, 오점이 없고 중단이 없는) 희열이 옵니다. . 
     


    28. 마음을 감각의 철수, 집중과 명상에 계속 관여시키는 요기에게 죄가 떨어져 나가고, 브람만/참의 무한한 희열을 쉽게 얻습니다.
    29. 요기는 직관의 눈으로 모든 것이 같음을 봅니다. 그는 모든 존재들 안에 참나가 있음을, 참나 안에 모든 존재들이 있음을 봅니다.
    30. 모든 곳에서 나를 보고, 모든 것이 나 안에 있음을 보는 사람을 나는 떠나지 않으며, 그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샹까라) 
    30. 모든 곳에서 나의 현현을, 나 속에서 모든 현현을 지각하는 사람은 결코 나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으며 나도 그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습니다. 
    31. 하나에 자리를 잡고, 모든 존재들 내에 거주하고 있는 나를 존중하는 요기는 그가 어떻게 살고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나 속에 있습니다.
    32. 자신에게 기쁨인 것이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도 기쁘고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이 다른 모든 존재들에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어떤 존재에게도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를 최고의 요기라 여깁니다.
    아르주나
    33. 크리슈나, 당신께서는 마음의 균일evenness이 요가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본성상 불안정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34.  오, 크리슈나시여! 마음은 본성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골칫거리이고, 강하고, 완강히 저항합니다. 마음을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바람을 제어하려는 것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크리슈나
    35.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은 불안하고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르주나, 그것은 규칙적인 수련과 초연으로 통제될 수 있습니다.
     36.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요가를 얻기는 매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신을 통제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노력한다면 그것에 이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르주나
    37. 크리슈나시여,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어서 요가로부터 떨어져 요가의 완성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38. 오, 크리슈나시여! 세상의 성공이나 브람만으로 가는 길로부터 떨어진 그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소멸됩니까?
    39. 크리슈나시여, 저의 이 의심을 안전히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당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 의심을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크리슈나
    40. 아르주나,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나 그에게 파멸은 없습니다. 나의 아들아! 좋은 일을 하는 이는 결코 슬픔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41. 요가에 떨어진 사람은 사람들은 의로운 이들이 사는 세계로 갑니다. 거기에 오래 동안 살다가 그는 순수하고 부유한 가정에 다시 태어납니다.

     42. 혹은 그는 지혜가 풍부한 요기의 가정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생은 이 세상에서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43. 아르주나, 거기서 그는 그의 이전의 몸에서 얻은 지식에 접촉합니다. 그래서 완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44. 자신의 이전의 수행의 힘으로 그는 필연적으로 요가를 하게 됩니다. 요가의 지식을 거저 알기를 원하는 사람조차도 단순히 의식rituals을 행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높이 올라갑니다.
    45. 여러 번의 탄생을 거치며 진지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요기는 모든 죄가 정화되고는 마침내 지고의 희열에 들어갑니다. 
    46. (명상의) 요기는 몸을 수련하는 고행자들보다 낫고, (경전적) 지식의 사람들보다 낫고, 또한 의식을 행하는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르주나, (명상의) 요기가 되십시오!

    47. 그러나 모든 (명상하는) 요기들 중에서도 진지한 믿음으로 마음이 늘 나와 하나 된(나에게 잠겨 있는) 이가 최고라는 것이 나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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