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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따


이스와란 기따 3-4장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17-05-25 08:42     조회 92



    제3장
    이기심 없는 봉사


      산스끄리뜨로 이 장의 제목은 까르마 요가, 즉 “행위의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 장의 주제를 명백하게 모질게 외면한다. 실제 아르주나는 주제를 완전히 바꾼다. 크리슈나는 그가 불멸의 영혼임을 그에게 확신시키려 해 왔지만 아르주나는 그의 당면한 곤경에 대해 계속해서 걱정한다. 그가 신비주의적 깨달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그의 주요 관심사는 단지 다음에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혹은 어쩌면 그가 하는 것이 결국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지 그는 묻는다. 크리슈나는 그에게 영적 지혜를 습득하는 데 집중하고 세상에서의 그의 명백한 의무에 대해 잊어버리라고 말해오고 있는가?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이기심 없는 행동 즉 까르마 요가의 의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대답한다. 아르주나는 사명감으로 이기심 없이 행위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 크리슈나는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기반이 되는 기본 법칙이라고 지적한다. 각 존재는 모든 오랜 까르마의 속박을 느슨하게 하는 완전한 깨달음을 제외하고는, 큰 계획안의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의무를 피할 길은 없다.
      여기서 기따는 모든 힌두교와 불교 경전의 기본 가르침 중의 하나인 까르마의 신조를 언급한다. 까르마는 문자 그대로 행위 또는 행동을 의미한다. 때로 “까르마의 법칙”은 모든 존재에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밑에 있는 인과 법칙을 말한다. 모든 행동은 합당한 결과로 나아가게 한다. 결국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에 행해졌던 어떤 것으로 거슬러 갈 수 있다. 행동이 운명을 결정한다. 이것이 까르마의 기본 생각이다. 만약 정말 좋은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면 과거에 우리는 그럴만한 어떤 일을 했음에 틀림없다. 만약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과거의 언젠가 우리는 그다지 칭찬할 만하지 않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들이 공유하는 도덕 법칙, 즉 뿌린 대로 거둔다는 믿음이다.
      힌두 전통은 이 도덕적 인과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 대대로 영적 스승들은 그 깊이와 관련을 헤아려보았다. 세월에 걸쳐 발전한 하나의 우려는 모든 행동이 어떤 의미에서 속박을 자초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한 어떤 것은 끝이 없는 원인과 결과의 순환에 그를 묶을 것이다. 행동의 어떤 “결실”은 물론 즐거울 것이다. 모든 까르마가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즐거움조차도 함정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기회에 더 꽉 우리를 묶고 우리의 영적 관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강박적으로 이것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 인과의 미로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 특히 삶에서 그의 지위에 요구되는 의무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실”이나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 없이 그런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만약 아르주나가 이 이기심 없는 일의 길을 따른다면, 그는 이 세계 뿐 아니라 다음 세계도 즐길 것이라고 크리슈나는 설명한다. 더 중요하게는, 그는 영적 축복을 받을 것이고 까르마의 빚을 가볍게 할 것이다. 그가 까르마의 모든 속박, 즉 과거 행동이 모든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그는 삶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스스로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에 세계는 그 자신의 활동에 의해 묶어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결과에 구애받는다. 우리는 자아 개입이 없고 일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결과를 내는지 아닌지에 휘말리지 않는 이기심 없는 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그때에만 우리는 끔찍한 까르마의 그물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의무를 멀리함으로써 까르마를 피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심지어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사실 힌두교 경전은 행동을 금하지 않는 또 다른 길인 지혜의 길, 즉 갸나 요가를 펼쳐 보인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실제로 아르주나에게 이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정받은 다음 흐지부지해진다. 어쩌면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스스로 벗어나서 신비의 비전을 찾아 떠날 사람이 아님을 알지도 모른다. 아르주나에게는 적극적인 삶이 아주 중요하다.
      물론 세상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삶의 위험 때문에 아르주나는 자신의 행동에 휘말리게 되고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영적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아르주나는 상당한 자기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위험을 감지한다. 그는 크리슈나에게 기본적인 질문을 한다. 어떤 힘이 우리를 이기적인 길에 묶어 두는가? 설령 바르게 행동하고 싶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옳지 않은 일을 한다. 어떤 힘이 우리를 움직이는가?
      크리슈나는 분노와 이기적인 욕망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라고 대답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기만과 절망으로 끝난다. 
      여기서 힌두 철학의 두 가지 기술적 용어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기따는 학문적인 철학 작품이 아니라 시적이고 실용적인 경전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이따금씩 여섯 개의 정통 인도 철학 학파 중 하나인 샹끼야를 언급한다. 샹끼야에서는 마음과 물질의 현상 세계가 세 가지 기본 특성, 즉 구나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삿뜨바는 선, 빛, 순수이다. 라자스는 열정, 활동, 에너지이다. 따마스는 어둠, 무지, 무기력이다,  샹끼야에 의하면 영적 진화는 따마스에서 라자스로 그리고 삿뜨바로 발전하고 마지막 해방은 영혼을 세 가지 구나 완전히 너머로 데리고 간다.
      여기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라자스의 함정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분노와 이기적 욕망이 라자스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본성인 아뜨만이 구나의 개입을 초월함을 깨달아야 한다. 구나는 서로에게 작용하고 반응하지만 아르주나의 내면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만약 이 초연detachment에 이르지 못하면 그는 마음과 육체를 번갈아 지배하는 정서적 열정의 폭풍인 라자스 또는 무기력의 수렁인 따마스에 언제나 갇혀 있게 될 것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왕자의 신분에 대한 본보기로 신성한 설화에서 잘 알려진 자나까 왕의 예를 보여준다. 자나까는 훌륭한 통치를 했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왕이었다. 그러나 개인적 이익이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연을 지키면서 의무감에서 일했다. 그는 세상을 포기함으로써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일하고 세상의 행복을 위해 공헌함으로, 그래서 각각의 장점을 즐김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한 왕족의 현자로 추앙받았다.
    -D.M.


      

    3장 이기심 없는 봉사
                             

    아르주나
    1. 오, 크리슈나시여, 당신은 지식/이해이 행위보다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왜 저에게 이 끔찍한 전투에 참가하라고 하십니까?

    2. 당신의 가르침은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여서 저의 지성은 혼란스럽습니다. 저에게 최고의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이 둘 중 하나를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신성한 신께서 말씀하셨다. 
    3. 오, 아르주나. 이 세상의 처음에 나는 구원으로 가게 하는 두개의 길을 주었습니다. 현명한(날카롭고 미묘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을 통한 신성한 결합과 활동적인 명상을 통한 신성한 결합입니다. 
    4. 행위를 거저 그만둔다고 해서 까르마 너머에 이르지 못합니다.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5. 어느 누구도 단 한 순간일지라도 행위 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연에서 나온 속성(구나)들에 의해 정말이지 강제됩니다.
    6. 행위의 기관을 강제로 통제하고 있지만, 마음이 감각의 대상들 주위를 회전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위선자라 불립니다. 
    7. 그러나 마음으로 감각들을 통제하면서, 아르주나, 집착이 없이 까르마 요가에 몸을 관여시키는 사람이 더 우수합니다.
    8. 그대의 의무를 행하십시오. 왜냐하면 행위가 무행위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위 없이는 자신의 신체적 몸조차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9. 일을 신을 위한 희생(얏나)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물질적 세상에 묶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르주나, 그분의 만족을 위하여 그대의 의무를 행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는 항상 집착이 없으며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있을 것입니다. 
    10. 인류의 창조자인 브람마(쁘라자빠띠)는 희생(얏나)으로 모든 창조물을 만들고 그리고 안간과 데바들을 내보낼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얏나로 행복하십시오. 왜냐하면 얏나를 하면 그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어질 것입니다.”
    11. 희생으로 그대는 데바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역시 그대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서로서로를 기쁘게 함으로  그대는 최고의 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12. 그대의 희생에 기뻐한 데바들은 그대가 바라는 즐거움을 정말로 그대에게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들을 즐기기만 하고 답례로 그것들을 내놓지 않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13. 얏나 후 남은 것을 먹는 의로운 사람들은 과거의 죄로부터 풀려납니다. 그러나 자신 의 감각적 만족만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이들은 오직 죄를 먹습니다.
    14. 음식으로 모든 창조물들이 생깁니다. 비로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얏나(우주적 희생의 불)로 비가 옵니다. 우주적 불(빛)은 까르마(신성한 진동의 행위)의 결과입니다. 
    15. 아르주나, 이 신성한 진동의 행위는 브람마(신의 창조적 의식)로부터 옴을 아십시오. 이 창조적 의식은 불멸의 분(영원한 영, 희열로 있는 무한한 의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 편재하고 있는 브람마는 언제나 늘 얏나(우주적 불 혹은 빛)를 하고 있습니다.
    16. 아르주나, 모든 생명은 이 법칙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흐르는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각의 쾌락에만 탐닉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헛되이 살고 있습니다.
    17. 그러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영혼에 충분히 만족하고 오로지 영혼에 전적으로 흡족함을 발견합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의무가 없습니다, 
    18. 그러한 사람은 행위를 하여 얻고자 하는 거는 것이 없으며,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잃는 것이 없습니다. 그는 어떤 것을 위하여 어느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19. 그러므로 행위의 결실을 바라지 않고 항상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모든 행위를 집착이 없이 함으로, 세상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십시오. 사람은 이기심 없는 일에 대한 헌신으로 삶의 최고 목표에 이릅니다.
    20. 자나까 왕과 그와 같은 다른 이들이 올바른 행위의 길만으로 완성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안내하기 위한 목적만으로도 그대는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21. 훌륭한 이가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하려고 합니다. 그의 행위는 세상 사람들의 행위의 기준이 됩니다.


    22. 아르주나, 나는 세 세상에서 내가 성취해야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내가 가지지 못하여 얻어야 할 것이 없으며, 내가 해야하는 의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행위를 합니다.
    23. 만약 내가 일을 계속해서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 사람들은 나의 본을 따를 것입니다.

    24. 내가 행위 하기를 그만둔다면, 세상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나는 심각한 혼란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피조물의 파괴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25. 아르주나, 무지한 사람들은 집착과 보상의 희망으로 행위를 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기꺼이 세상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한 봉사로 무집착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26. 현자는 일의 결실에 집착하고 있는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켜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현자는 완전한 (이기심이 없는) 행위를 계속해서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의무를 다하도록 영향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27. 태고의 자연(쁘라끄리띠)의 속성(구나)들에 의하여 모든 행위들이 일어납니다. 참나가 자아로 채색된 사람이 “나는 행위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28. 그러나 오, 힘이 센 자여! 그러나 구나(에너지)의 구분과 그것들의 기능들 즉 안의 구나들이 감각 대상들인 바깥의 구나들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자신의 참나를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도록 지킵니다. 
    29. 이 사실을 이해하거 있는 사람들은 불완전한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당황하게 않아야 합니다. 쁘라끄리띠의 구나들에 미혹된 무지한 사람들은 이 구나들이 일으키는 활동들에 매달립니다. 

    30. 그대의 모든 행위를 나에게 넘기십시오! 이기심과 기대 없이, 그대의 주의를 영혼에 집중하고, 걱정에 들뜨지 말고, 전쟁에 참여하십시오.
    31. 나의 가르침을 흠을 찾지 말고 끊임없이 수행하는 헌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 역시 모든 까르마를 벗어나게 됩니다.

    32. 그러나 나의 가르침을 비난하면서 이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이해를 지니지 못하여 몰락합니다.
    33. 지식의 사람도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행위를 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자연을 따릅니다. 무엇이 이 흐름을 소용이 없도록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34. 감각은 좋아하는 감각 대상들에 끌리고 좋지않는 대상들을 싫어하도록 자연이 정해놓았습니다. 이 이원성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 둘(심리적 속성)은 자신이 적입니다!
    35. 비록 다른 사람의 의무를 잘 할 수 있을지라도 잘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무는 두려움과 위험을 가져옵니다.

    아르주나
    36 오 크리슈나시여,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된 듯 죄를 짓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
    37. 그것은 라자스 구나에서 나온 이기적 욕망과 분노입니다. 열렬히 탐하고 매우 해로운 이것이 적임을 아십시오.
    38. 아르주나, 연기가 불을 가리고, 먼지가 거울을 가리고, 자궁이 태아를 가리고 있듯이, 지식은 이기적 욕망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40. 감각, 마음과 지성이 그것의 자리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통하여 욕망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것의 지식을 가려 미혹시킵니다. 
    41. 그러므로 아르주나, 먼저 감각들을 훈련시키십시오. 그 다음에 지식과 참나 깨달음의  사악한 파괴자인 그대의 이기적 욕망을 정복하십시오.
    42. 감각들이 몸 보다 더 우수하며, 마음이 감각들보다 더 우수하며, 지성이 마음보다 더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나는 지성보다 더 우수합니다. 

    43. 이제 참나가 지성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자아)를 참나(영혼)으로 훈련하여, 욕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복하기 어려운 적을 파괴하십시오. 




     
    제4장
    행위의 지혜
    .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최고의 영적 진리에 대한 지식, 즉 희귀한 신비적 비전이라도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에게 현재의 곤경에서 벗어나게만 해 달라고 요구해오고 있다. 물론 이런 곤경들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지독한 갈등으로 발전한 가족비극을 만난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파멸의 전투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비밀스런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그가 크리슈나가 총애하는 헌신자이자 친구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듣는 특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르주나의 의식에서는 전혀 인식되지register 않는다. 그의 대답은 혼란스럽다. “어떻게 당신은 과거의 현자들에게 신비의 지혜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까?”라고 그는 묻는다.
      여기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다시 한 번 환생의 과정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모두 여러 번 다시 태어났지만 아르주나는 이런 종류의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과거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 크리슈나는 그의 이전 탄생을 기억한다. 그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 세계의 행복을 위해 여러 번 인간으로 태어나기로 택했다는 것을 밝힌다. 삶이 하나unity라는 법칙인 다르마가 쇠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마야로 스스로를 감싸고 유한한 형상을 입는다. 이렇게 그는 매 시대마다 돌아온다. 
      힌두 삼위일체를 지키거나 유지시키는 사람인 비슈누는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보통 신의 이런 측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크리슈나는 신으로서 자신은 모든 존재 안에 거하지만, 그는 자신의 화신 즉 아바따에서 특별한 힘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아바따는 말 그대로 혈통을 의미한다. 비슈누는 신성한 법칙(다르마)을 재건하기 위해 대대로 지구상에 화신으로 내려온다고 믿어진다. 그런 개입이 없으면 전체 창조된 우주는 쇠퇴할 것이다. 자연적인 창조 과정은 재창조와 쇠퇴의 주기를 거치는 것이지만, 비슈누(크리슈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 선을 보호하고 악을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 나타난다. 이렇게 비슈누는 모든 존재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그는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황금시대의 순수함과 행복을 재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신적인 측면의 화신이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자신의 숨겨진 신성한 본성을 약간 드러낸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그와의 신비스런 결합union은 헌신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에 의해 사람은 모든 생명체에게서 신을 보는 신성한 사랑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크리슈나는 또한 창조자의 역할도 맡는다. 구나와 까르마의 선lines을 따라 세상의 패턴을 만든 것이 바로 그이다.
      크리슈나 존재의 이 신비적 측면이 기따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dominate. 마하바라따에서 크리슈나는 그의 친구 아르주나를 후원해주는 현명하고 대담한 엄청난 협력자이다. 하지만 기따의 작가는 이 크리슈나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비슈누 측면으로서 크리슈나의 신성한 본성의 신비에 관심을 돌린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슈나는 모든 존재 안에 있는 내면의 참나이다. 그의 이름은 산스끄리뜨 기원의 krish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 마음을 끌다.”에서 온다. 그는 “마음을 끄는 존재”, “사랑스러운 매력의 신”이다. 다른 어원에 의하면 크리슈나라는 단어는 “어둠의 존재”를 의미한다. 기따의 작가는 그에게서 드러난 궁극적 신, 최고 존재를 본다. 하지만 이 실재는 종종 감춰진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보통의 인간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아니지만 특별히 재능이 있는 인간으로 보인다.
      크리슈나의 많은 말들은, 그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통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참나에 대해 아르주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만큼 초월적인 실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깨달을 때 가장 이치에 맞는다. 예를 들어 “나는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행동은 나에게 매달리지 않습니다.”라고 그가 말할 때, 그는 “아르주나, 행동은 너의 진짜 참나에 매달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참나는 행동에 닿지 않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더럽혀지지 않고 남아 있다. 자신에 대한 “이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삽니다.”
      이 장의 후반부는 고매한 신비스런 주제에서 아르주나의 당면한 문제로 되돌아간다. 크리슈나는 행동, 일 그리고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초연detachment을 가지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상기시킨다. 현명한 사람은 절대 그들의 노동의 결실에 대해 이기적인 집착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운이 좋을 때나 불운할 때나 똑같이 최선을 다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롭게 행동한다.
      다음 장은 상이한 기질을 가진 영적 구도자들이 수행할 것 같은 다양한 종류의 얏나 –숭배 또는 공물offering- 을 다룬다. 힌두교 의식은 공물을 신성한 불에 던져 넣음으로써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과 종종 관련이 있다. 여기서 이미지는 똑같다. 공헌되는offer 것은 무엇이나 공물을 신에게 옮겨 주는 강렬한 불길속으로 상징적으로 던져진다. 그 공물은 세상의 물건들처럼 명확한obvious 것일 수도 있고, 지식이나 명상과 같은 미묘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필요로 한다. 얏나는 삶에 필수적인 기본적 행동이다. 어떤 이기심 없는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 혹은 다음 세상에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한다.
      제4장의 마지막 시는 새로운 원리principle을 소개한다. 마지막 장에서 크리슈나는 행동의 길, 즉 까르마 요가의 대안으로 영적 지혜의 길을 언급했다. 이제 그는 그 지혜가 이기심 없는 행동의 목표라고 밝힌다. 앎은 행동의 결실이다. 모든 까르마 요가, 즉 얏나yajna의 목표는 해방과 영적 지혜이다. 영적 자각의 불길은 큰 까르마 더미도 불태워 재로 만든다. 이와 같이 진정한 지식은 영혼의 가장 큰 정화자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여전히 그를 억누르고 있는 의심을 없애라고 타이름으로써 이 장을 끝낸다. 이것은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의심하는 가슴에 대해 한 첫 번째 언급이다. 마지막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아르주나가 크리슈나의 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조짐은 없었다. 하지만 아르주나가 계속 꾸물거려도 크리슈나는 그를 버리지 않는다.

    ???
    ‘절제’한다는 것은 제한한다는 뜻이다. 무슨 형태로 생명의 호흡이 통제되든, 그것 안으로 그들은 다른 모든 생명의 호흡을 희생한다.  말하자면, 후자는 전자 속으로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D.M.


    4. 행위의 지혜


    크리슈나
    1. 나는 이  불멸의 요가를 비바스바뜨에게 주였으며, 그는 그것을 마누에게 전했습니다. 마누는 다음에 익슈바꾸에게 가르쳤습니다.

    2. 아르주나,  요가의 과학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대를 이어가며 계속해서 전해졌습니다. 현자 왕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이 요가는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3. 그대가 나의 헌신자이자 친구이기 때문에 지금 나는 같은 고대의 이 요가를 그대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심오한 요가의 비밀은 인류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아르주나
    4. 비바스바뜨가 먼저 태어났습니다. 당신은 그보다 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이 요가를 전했다는 말씀을 어떻게 제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
    5. 아르주나, 그대와 나는 많은 탄생을 경험하였습니다. 나는 그것들 모두를 알고 있지만, 반면에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6. 나는 태어나지 않고 영원하다. 그러나 모든 창조물의 주인이 되어, 나 자신의 우주적 자연(쁘라끄리띠)에 있으면서, 환영(마야)의 나의 힘으로 나 자신을 태어나게 합니다.  
    7. 옳음(다르마)이 쇠퇴하고 아다르마(악)가 기승을 부릴 때, 나는 아바따(화신)으로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8.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악한 사람들을 파멸하기 위하여 그리고 덕(다르마)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나는 보이는 모습으로 매 세대에 태어납니다.     
    9. 나의 신성한 나타남과 진동하는 행위를 아는 사람은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를 얻습니다. 아르주나. 
    10. 집착, 두려움과 분노가 없으며, 나에게 피난한,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금욕(불, 따빠스)로 자신을 정화한 사람들이 나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11. 무슨 방법으로든 나에게 헌신하면, 그것에 맞추어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르기 위한 많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12. 비록 데바(마이너 신, 천사)들의 숭배가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행해지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없더라도 일을 하면 바라는 성공이 빨리 옵니다.
    13. 구나들과 까르마들의 구분에 따라, 나는 네 까스뜨(마음의 경향성)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내가 그것들을 만들었지만, 나는 행위 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14. 어떤 행위도 나를 더럽히지 못하며, 또한 나는 결실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를 이렇게 아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묶이지 않습니다. 
    15. 이것을 이해하고서, 깨달음을 구했던 옛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의무적인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 역시 그들처럼 의무적인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16. 현자들조차도 행위와 무행위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무엇이 행위인지를 그대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그대는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17. 무엇이 정말로 행위인지는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적절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행위와 무행위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18. 행위 속에서 무행위를, 무행위 속에서 행위를 보는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 지혜로우며, 그는 요기입니다. 그는 행위의 나쁜 결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성취했습니다. , 19. 일을 자기 의지와 이기적 욕망이 없이 하며, 자신의 일이 지식의 불로 타버린 사람을 현명하다고 현자들을 말합니다.
    20. 일의 결실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며, 늘 만족하며, 독립적인 그는 비록 무엇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21. 그러한 이해의 사람은 이기적인 욕망이 없으며,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있으며, 소유물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해도, 그는 아무런 죄를 초래하지 않습니다.
    22.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오는 것에 만족하며, 이원성 너머에 있으며,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성공과 실패에 마음이 차분한 사람은 비록 행위를 해도 결코 묶이지 않습니다.
    23. 집착이 없으며, 다르마와 아다르마에서 자유로우며, 지식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의 일은 얏나로 행해지기 때문에, 모든 까르마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24. 공물을 바치는 사람이 브람만(spirit)이며, 공물을 받는 자가 브람만이며, 공물을 바치는 과정이 브람만입니다. 브람만이 브람만의 불 안으로 공물을 바칩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에서 브람만을 보는 사람은 브람만을 정말로 깨닫습니다. 
    25. 어떤 요기들은 데바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어떤 이들은 자기에 의해 만들어진 희생으로, 자기에게 브람만(절대적 신)의 불안에서 공물을 바칩니다.
    26. 어떤 이들은 듣기 보기 등과 같은 감각의 힘을 통제된 마음의 불 안으로 공물로 바칩니다. 다른 이들은 순수하고 금지되지 않는 소리 등과 같은 감각 대상들을 감각의 불 안으로 공물로 바칩니다. 
    27. 어떤(갸나 요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식에 의해 켜진 마음의 불 안으로 모든 감각의 행위와 쁘라나의 기능을 공물로 바칩니다.
    28. 어떤 이들은 부를, 고행을, 요가수행의 결실을 공물로 바칩니다. 엄격한 맹세를 한 다른 이들은 경전 연구의 지식을 공물로 바칩니다.  
    29. 호흡의 흐름을 제한함으로 생명력의 통제에 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날숨을 들숨에, 들숨을 날숨에 공물로 바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합니다. 그들은 다섯 유형의 쁘라나와 그것들의 기능을 하나의 공통된 쁘라나의 불에 공물로 바침니다. 30. 이 모든 이들은 희생(얏나)의 의미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희생으로 파괴됩니다.
    31. 이 희생 의식들의 불 중 어느 하나라도 하고 그것에서 남은 넥타와 같은 남은 부분을 먹는 사람들은 브람만(영원한 영)에게로 갑니다. 그러나 브람만의 깨달음은 진정한 영적 의식을 행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희생이 없이는, 어떻게 고양된 의식의 상태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32.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희생으로 신에 이릅니다. 각 희생은 그들의 까르마에 따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33. 지식의 희생이 물질의 대상의 희생보다 더 우수합니다. 아르주나, 모든 다른 희생의 행위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4. 만약 그대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로부터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들 앞에 엎드려 절하고, 질문하고, 섬기십시오.
    35. 그대가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아르주나, 다시는 결코 혼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창조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대의 부분이고 나의 부분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36. 그대가 비록 모든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대는 지혜의 배로 모든 죄를 정말로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샹카라)
      
    36. 아르주나, 설령 그대가 죄인 중의 죄인일지라도, 이 깨달음의 지혜의 뗏목을 타고 그대는 조와 악의 바다를 확실히 건널 것입니다. 
    37. 타오르는 불이 연료를 재로 만드는 것처럼, 그대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불은 그대의 모든 까르마를 재로 줄일 것입니다.
     38. 의심의 여지없이, 진정한 앎에 대한 깨달음만큼 그대를 정화시켜 주는 것은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가를 통하여 일어선 사람은 때가 되면 자신의 가슴 안에서 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39. 진지한 믿음과 헌신이 있고, 자신의 감각을 통제한 이들은 이 지혜를 일으킬rise to  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면, 그는 곧 지고의 평화의 깨달음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40. 무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진지한 믿음이 없어서 늘 의심합니다. 그들은 몰락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현재 불행하며 미레에도 불행합니다.
    41. 그대가 그대의 모든 행위를 헌신하여 그대의 일이 까르마 요가가 된다면, 남아 있는 모든 의심이 그대의 일깨움의 불 안에 파괴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모든 굴레는 떨어져나가고 그대는 참나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r
    42. 그러므로 무지로부터 생겨나 가슴 안에 놓여 있는 참나에 대한 이 의심을 지혜의 검으로 산산조각내고 그리고 요가에 의지하라. 오, 바라따여! 일어나라. (샹카라)
    42. 아르주나, 영적 지식의 예리한 칼로 그대 가슴속에 있는 참나에 대한 이 의심을 잘라 버리십시오. 일어나arise 요가의 길을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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