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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여정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대학진학의 길을 접었다. 대구의 한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가 리어카와 채소를 살 돈을 꾸었다. 시장에서 오이와 딸기를 팔면서도 시집을 옆에 두고 있으니 행복했다. 노을이 물들면 팔 물건들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싸게 드리고 무엇인가에 취한 듯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장사는 쉽지가 않아서 접었다. 과자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길에서 성공하기는 어렵게 보였다. 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대학진학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시 공부를 하여 정말로 간신히 사범대학에 진학하였다. 졸업을 하고 바다가 가까운 영덕의 한 학교에 부임하였다. 교사생활은 좋았다. 그러나 교과서에 나와 있는 말인 진리, 자유,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학생들로부터 받고는 답에 흔들렸다. 교사로서의 삶에 자신이 없었다. 모교인 포항의 중학교로 옮겨 보았다. 교사직을 포기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에 교수님의 권유로 대기업에 취직하였다. 부산에서 근무를 하다가 서울 역 앞의 본사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좋았다. 그러나 5년여 동안 회사생활을 하다가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회사원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내 나이 33살. 어떤 성자는 이 나이에 자신의 일을 완성하고 생을 마감하지 않았든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자니 앞이 캄캄하였다. 이 질문이 어릴 때부터 맴돌곤 하였지만 답하려는 진지한 시간을 가져보지는 못했다. 주위에서 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선 이곳을 접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엇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가 여의치 않을 경우에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해보았다. 남원 같은 소도시의 환경 미화원 자리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산다는 것이 상쾌하고 즐거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웃었다. 주위 사람들은 너무나 좋은 곳으로 스카웃 되어간다고 생각하고는 부러워했다. 이제 보니 그것은 대단한 스카웃이었다.
      삶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여유 있는 삶은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병원에도 다녀오고 여정의 행운을 기원하면서, 또 나 자신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 돈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두툼한 백금 쌍가락지도 만들어 꼈다. 남산에 있는 국립국악원에 가서 단소도 조금 배웠다. 삶에 음악이 첨가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피리를 들고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이 세상을 돌아다닐 것이다. 
      서른셋의 맏이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자니 정말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지 않는가...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을 드리자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어느 날 아침 회사로 가서 사표를 냈다. 난생 처음 삶의 반대 방향을 걸었다. 출근길을 거슬러 가는 길에서부터 자유를 느꼈다. 물밀 듯 밀려드는 직장인들을 거슬러 간다는 것은 가슴이 떨리는 일이지 않은가.... 
      1980년 여름 조용한 곳을 찾다가 수덕사 근처로 가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산간이었다. 참 좋았다. 아무런 할 일이 없다. 아무 것도 하는 일없이 그냥 지내면서 소일하였다. 얼마나 오래간만에 찾은 여유인가.... 무엇인가를 이유 없이 바라보았더니 그것들은 나에게 웃음을 주었다. 보고 웃고...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 조용한 수덕사, 정혜사, 사찰 뒤에 보일 듯 말듯 들어서 있는 암자들, 넓은 들판,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하늘로 빨리듯 올라가는 굴뚝 연기, 덕산 온천, 어죽, 시골 신부님... 
      성당에 나가곤 하였는데, 신부님은 여러 날을 두고 나의 삶을 살피시더니, 심각하게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종교의 굴레를 간신히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나에게는 자유나 평화가..... 또 다른 굴레를 거부하고 난 자유를 택했다.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어가고 또 여행객들이 늘어나자 그곳을 빠져 나왔다. 
      강원도를 거쳐 가면서 지낼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그 해 늦가을 제주도에 이르렀다. 한라산을 넘어가니 서귀포가 나타났다. 그 평화롭고 안온하게 보이는 포구는 나를 사로잡았다. 지낼 곳은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귀포 항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이층집의 방을 얻었다. 가을 포구,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어선, 해녀들, 소라, 어부, 은빛을 번쩍이면서 끌려나오는 갈치, 검은 바위, 시인, 화가, 바다로 떨어지는 비, 밤바다에 쏟아 부어지는 달과 별빛, 바다 표면을 흐르는 묘한 기운... 시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를 써보려 했다. 감각은 있는데도 지식이, 지혜가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곳 겨울은 얼마나 추운가. 다다미방에다 뼈까지 냉기는 몰아치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목조건물은 늘 흔들거리면서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봄이 오면 부드러운 바람과 풀을 뜯어먹는 말, 봄 바다를 가르며 지나가는 배, 어부, 파래, 미역, 검은 돌, 정말로 낭만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식이, 지혜가 없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나는 좀 버렸다. 직장도, 사람도, 사랑도, 가정도... 그러나 나는 깊이가 없었다. 정말로 멋진 환경 아래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없었다. 평화란 이러한 시도에서 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름다울 수도 있을 미래가 뿌연 안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울 때면 그냥 길거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깎아지른 절벽이나 모가 난 검은 돌을 바라본다는 것이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서귀포에 머문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나의 인생은 이런 모습으로 끝나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서귀포에서의 일 년의 삶을 청산하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지혜를 샘솟게 하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제주 시로 옮겨 시원한 바다가 창을 통해 보이는 탑 동에 방을 얻었다. 50권쯤 되는 사상전집을 구해 주야로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상가는 평화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지식의 파편처럼 느껴졌다. 그들 역시 모가 난 서귀포의 돌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들을 놓아버렸다. 더 시도해야 할 것이 이제 없어졌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돈도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배가 고플 때면 밀감 밭 주위를 서성이기도 했다. 이층 방으로 난 창은 제주항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제 나도 뭍으로 떠나야할 것 같았다. 방랑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풍랑이,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는 큰 배조차 바다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배가 보이다가 산더미 같은 파도가 보이고, 숨을 죽이고 기다리면 배는 살아나서 기우뚱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그러면 또 산 같은 파도가 그 배를 덮치고 그 배는 또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또 나타나 자기 갈 길을 간다.  
      세상이라는 파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이번의 나의 생은 실패한 삶이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두려움도 느껴졌다.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화려하게 웃으며 출발했던 두해 남직한 방랑의 여정을 접고 쓴웃음을 지으며 세상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시골 오일장 장터의 상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낭만적일 것 같아서였다. 즐비한 팔 물건들, 국밥, 오고가는 순박한 사람들, 평화로운 시골길, 들판, 시냇물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직업이지 않은가... 그러한 존재들과 만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이 환경 미화원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1982년 2월 신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짧았지만 깊었던 자유로운 방랑에 종지부를 찍고 평범한 시골 상인으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때 누가 나의 방을 노크하지 않는가? 그것도 십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대학 동창생의 목소리가... 깜짝 놀랐다. "야, 가자, 지도 교수님이 널 데려오란다."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상한 모습과 변변찮은 옷을 입고 대학 강사면접을 보았다. 묻혀 질 수 있는 삶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길로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부산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를 했지만 주로 구덕산 자락에 있는 대학교였다.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순박한 학생을 보며 지내는 것은 천국 같았다.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마술세계에서 보이는 번쩍이는 물건 같았다. 그러한 생활을 몇 년 하다가 또 운이 좋아 창원의 한 대학교의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가르치다가 교재에 있는 명상이나 요가라는 주제에 자연적으로 시선이 가게 되었다. 수행, 명상, 행복, 희열, 사마디, 평화 등이라는 글자를 접하자 눈이 다시 한 번 번쩍 띄었다. 접어두었던 영혼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예수와 관련이 있는 종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늘 살다시피 하면서 경험하지 않았는가....... 내가 무디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서 나는 평화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붓다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알지 못하였다. 이곳에 무엇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몇 년 간 방학이면 송광사 주위의 암자에서 기거했다. 머물렀던 암자 위에는 불일암이 있었다. 그때 법정스님께서 그곳에 계셨다. 정갈한 암자에서 향기로운 차도 대접받았다. 어느 날 불쑥 저를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스님께서는 자신은 재가 제자를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송광사 방장 스님을 소개해주셨다. 방장 스님을 찾아갔다. 그분께서는 정갈한 옷을 하고는 깨끗한 방에서 나를 맞아주셨다. 불교의 수행에 입문하고자 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수식관을 좀 해보았느냐고 물으셨다. 아직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드리자, 좀 하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천 다솔사 위에 있는 봉일암에서 자상한 스님의 지도하에서 명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해 본적이 없는 내가 그 자세로 앉아서 마음을 통제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붓다는 인도 분이 아닌가? 내가 왜 여기에서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는 불교수행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분의 향기가 오롯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인도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났다. 붓다는 인도분이다. 거기에는 평화에 이르는 길에 쉽게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대사관에 요가 혹은 명상하는 곳을 문의하였더니 인도 전역에 빽빽한 점들이 박힌 지도를 보내주었다. 그 많은 점들을 보고서 너무나 놀랐다. 갑자기 희망이 보였다. 그곳으로 편지를 보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신비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답장이 왔다. 박사가 있다는 뉴델리의 국제요가연구소를 택했다. 
      해외 파견의 기회를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대학으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집이 문제였다. 사십하고도 두 해나 넘겨 갓 결혼한 상태가 아닌가... 귀여운 딸은 아직 첫돌을 반년이나 남겨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집사람에게 나는 인도로 가야한다고 말을 건넸다. 신기롭게도, 너무나 놀랍게도 허락을 해주었다. 실 날 같은 자유로 가는 행운의 기회가 흐트러질까 봐 떠나는 날까지 너무나 초조한 날을 보냈다. 
      1988년 12월 1일 메케한 냄새를 풍기는 인도 공항에 서류가방 하나만 들고 도착했다. 이런 모습으로 인도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공항의 통로에 거대한 검은 신상의 모습이 여행객을 맞이하였다. 이곳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처음부터 들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수많은 검은 얼굴의 인도인들과 무질서를 보고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곳은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너무나 딴 나라였다. 뉴델리의 라자빠뜨 나가르에 있는 국제요가연구소를 찾아갔다. 국제 연구소인데 연구생은 나 혼자였다. 국제란 여러 외국인들이 모여 있다는 선입견은 처음부터 허물어졌다. 혼자라도 국제는 국제다. 그러나 안내된 숙소를 보고는 놀랐다. 더러움이란 개념을 벗어버렸다. 그러자 그곳과 친숙하게 되었다. 얼마나 편한 친구들인가... 
      박사 부부는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각종의 정화의식을 한 후 집의 한 쪽에 있는 뿌자실에 들어가서 신께 경건한 찬가를 드린다. 그러고 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나무가 다소 우거진 연구소의 한쪽에는 아침 일찍 동네 분들이 모여들고는 일련의 하따 요가를 하였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사자소리를 내고는 흩어져 명상을 하였다. 그들이 가고 나면 정적은 더욱 깊어진다. 얼마나 신기로운 곳인가...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날 때면 정적이 흐르는 평화로운 그곳을 거닐기를 좋아하기 시작하였다.
      박사님과의 일대일의 강의가 오전 오후로 나누어 시작되었다. 인도의 정신에 대한 공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티타임이 되면 어김없이 짜이와 쿠키를 내오셨다. 집안일을 마치시면 그분은 양지 바른 곳에 앉아 까맣게 절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어떤 글이 담겨 있을까.... 사리를 걸치고 마당을 쓰는 하녀도 여유 그 자체였다. 우편 발송 일만 하는 하인도 그분 나름의 위엄과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무엇인가 다른 세상이다. 
      진도가 오늘날의 성자에 대한 장으로 나아갔다. 전설적인 인물이 은하수처럼 이 시대에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깜짝 놀랐다. 나의 기존 관념을 뒤집는 것이었다. 예수와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은 수천 년 전에 있었고 이제 흠모와 공경의 대상으로 저 멀리에 두고 있었던 나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뒤집는 내용이었다. 먼 과거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에도 그와 같은 분들이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인가? 그들을 만나 보고픈 충동이 일어났다. 나는 들뜨기 시작하였다. 길이 보인다. 박사님에게 어느 날 “당신은 사마디를 경험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마디 가까이는 갔다. 그러나 경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업을 그만두고 성자들을 만나기 위한 필사적인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위대한 영혼을 찾아내야만 한다. 
      뉴델리의 슈리 오로빈도 아쉬람에 들렀던 그날은 지는 해와 노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온통 보라 빛의 세상이었다. 은발의 긴 머리에 하얀 숄을 늘어뜨리며 평화로워 보이는 분에게로 다가가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어디로 가면 좋습니까?” 그분은 눈이 유난히 빛나는 인도 분을 불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더니, 빛나는 눈길로 “알란디로 가세요, 알란디로. 거기에서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란디로 가세요.”라는 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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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을 새며 기차를 타고 봄베이 근처에 있는 알란디라는 시골 마을에 도착하였다. 온 마을이 사원이었다. 알고 보니 크리슈나 헌신자였던 갸나데바의 성지였다. 그는 마라띠어로 너무나 아름다운 바가바드 기따의 주석서인 갸네쉬바리 기따를 남기고 열일곱이라는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스스로 마감한 성자였다. 아니 열일 곱 살이라고? 나는 그때는 철이 들지 않은 때가 아닌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자신이 이 세상을 하직해야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성자 남데브와 북쪽으로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명상을 하던 동굴로 들어가고 제자들에게 입구를 봉하게 하고는 스스로 사마디에 든 곳이란다.
      사원의 방을 통해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인드라야니 강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성스러움과 평화의 물결이 휘몰아쳐 그날 밤 잠을 설쳤다. 그 다음날 사원 안내인은 서고의 깊은 곳으로 나를 안내하더니 옥스퍼드 대학에서 나온 갸네시바리 기따를 보여주었다. 크리슈나를, 진리를 찾아가는 나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뭄바이의 한 호텔 웨이터에게 어디로 가면 좋으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주후 해변에 있는 이스콘ISKCON으로 가라 한다. 박띠 요가의 사원이었다. 온 사원을 공명하며 울러 퍼지는 크리슈나 찬팅에 온 몸이 진동하였다. 같이 간 외국인은 며칠을 견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떠나버렸다.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 하레 크리슈나 하레 크리슈나 크리슈나 크리슈나 하레 하레> 이 지상에 신 이름을 이처럼 열렬히 부르는 곳이 있단 말인가... 새벽에 주후 해변을 오르내리며 이 만뜨라를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의 프레지던트인 만다빠 다스 스와미가 새벽 아라띠 때 신 크리슈나께 바쳤던 화환을 나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곳 비슈누 땃뜨바 다스라는 젊은 스와미는 여정을 머뭇거리게 할 정도로 지적이었다. “당신의 본성은 아뜨만이지 않소.” 그것은 그렇다. “이제 당신이 어디로 갈 수 있겠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곳의 높은 분에게로 안내되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신의 하인이다. 이 사원에 머물러라. 일을 하나 주겠다.” 나는 고국을 떠올리며 현실적인 생각을 만들어냈다. 나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국, 가족 및 직장이 있지 않는가? 고맙지만 완곡하게 거절하고 그곳을 간신히 빠져 나왔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오쇼 라즈니쉬를 찾아갔다. 그분의 아쉬람은 녹음이 짙은 인도의 오아시스였다. 수많은 산야신과 그분들의 자연스러움을 보는 것이 싫지가 않았다. 저녁마다 고따마 붓다 오디토리옴에서 있은 오쇼의 명 강연을 들었다. 그분은 화려한 용모, 시적인 수사와 매력적인 목소리로 사람들을 그분에게로 잡아당겨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분은 허스키  목소리로 “그대는 순수한 금이다. 그대는 순수한 금이다. 그대는 순수한 금이다. 그대는 붓다다. 그대는 붓다다. 그대는 붓다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얼마나 매혹적인 말인가.... 매혹적인 환경과 말이 있었지만 그러나 나의 영혼은 거기에 머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가따뿌리에 있는 국제 비빠사나 아카데미의 초보자 과정에 들어갔다. 비빠사나는 인도의 가장 오래된 명상 기법 중 하나라 한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고따마 붓다에 의하여 다시 발견되었다고 한다. 비빠사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이라고 한다. 고엥까님의 지도하에 비빠사나 명상을 하였다. 명상 기법이라기보다는 그곳의 환경과 그분의 인품에 감동을 받았다. 그곳의 성스러움은 나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집중적으로 앉아 명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오래 간만이었다. 7일째 날 오후 명상 중에 나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청명한 그 무엇이 드러났다. 이것은 나의 삶에서 처음 경험한 그 무엇이었다. 너무나 야릇한 경험을 하고는 고엥까님을 찾아가,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사마디라 하셨다.
      봄베이 소재 샨따 크루즈 요가 연구소의 요가 오리엔테이션 캠프에 참여하였다. 화려한 수식이 없는 순박한 요가 연구소였다. 그곳에 들어가자 성자의 어머님께서 나의 여정을 듣고는  “왜 쓸데없는 곳을 다녔느냐”면서 나무라셨다. 프로그램 마지막 날 저녁은 성자에게 질문 쪽지를 내놓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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