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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 뿐자의 가르침

생애 / 가르침 / 미디어 / 갤러리


빠빠지를 만난 사람들 -요한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17-08-01 15:30     조회 131

    요  한
                                                          
     나는 요한의 겸손과 진실성에 감동 받았다. 우리는 오직 두 번 만났다: 한번은 우연한 나의 초대에 이끌린 것이고 또 한 번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멋진 오후에  이 조용하고 겸손한 남자와 함께 공원에 앉아 있었다. 그때 이후  나는 그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에 그는 그의 형의 정원사로서 조용히 살고 있었고, 진정한 선승(禪僧)이었다.

    '나는 그것이 놀랍도록 단순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파파지가 “바로 그것이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교묘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감사함으로 충만했다.‘

    나는 193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나는 우리 가족의 4형제 중 셋째였다. 내가 2살 때 우리는 힘스테드라는 시골로 이사했다.  우리 집은 부유했다. 나의 아버지는 은행의 부장이었다. 내 최초의 기억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에 관한 것이다. 내가 4살 때였다. 어머니 또한 그 사고를 당했다. 그녀는 우리를 불러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말해주었다. 나는 비록 그것들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나 사진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네 명의 어린 아들들과 함께 남겨졌다. 나는 어린 시절 좋은 추억들이 있다고 말해야한다. 나의 형제들과 나는 많은 놀이를 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시골에 토지를 소유했었다. 가족 모두 매 주 휴일이면 그 곳에 가곤 했다. 내가 어린 시절을 생각 할 때 나는 항상 나의 가족, 나의 조부모님, 나의 사촌들과 함께 그 땅에서 보낸 휴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당신의 어머니는 재혼 했나?


    아니다, 어머니는 결코 재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행복한 결혼을 했었다고 우리에게 말했고,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시작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했다. 그녀는 재정을 돌봐야 했다. 그녀는 매우 훌륭한 필적학자(筆蹟學子)였다. 한나는 처음에 요리사로서 왔었으나 후에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독일인이었고, 그녀에게서 나는 일찍이 인내심을 배웠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의지 하라고 항상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곤 했으며,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일부로서 남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그는 살아 있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여전히 그런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많이 아버지를 그리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는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요청하도록 그 곳에 있었다.


    당신은 점차적으로 영적인 지지의 일종으로 당신의 아버지와의 강한 유대감을 발전 시켰나?


    어른이 되어서조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와 대화 했고, ‘자, 이것은 어려워요, 나를 도와 줄 수 있나요?’ 하고 말했으며,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것은 항상 해결되었다. 현존함을 믿는 것은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준 선물이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나는 도움을 받고는 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로 부터의 도움을 늘 연관 지었으며, 나는 오랫동안 그 관계를 유지 했었다. 우리는 유대감이 깊은 가족이었고, 특히 오늘 날의 젊은이들을 고려해볼 때, 나는 매우 보호 받았었다. 나는 인생에서 무슨 일이 있는가에 대해 너무 무지 했었다. 나는 성장하는 것이 늦었다.


    당신은 당신의 학교 교육에 대해 무엇을 말 할 수 있나?


    나는 유치원에서부터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까지 몬테소리 학교에 다녔다. 나는 학교에 대해 좋은 추억들을 가졌다. 그것은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있었고,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시골집이었다. 대개는 나는 학급에서 거의 꼴찌였으나, 항상 시험을 통과했다. 몬테소리 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비즈니스 스쿨에 다녔다.  나는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나의 어머니는 내 나이의 다른 사람들이 있는, 많은 스포츠와 언어를 배울 기회가 있는 학교에 가는 것이 유용하리라고 생각했다. 학교는 굉장히 강인하게 되도록 교육시켰다. 나는 학교를 마치기 위해 힘들게 공부해야 했지만, 나는 해냈다. 나는 20세에 졸업했다. 그 후 나는 군대에서 2년 동안 복무했는데, 나는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과 만났으므로, 나를 위해 매우 유익했다. 나는 그 군 복무를 즐겼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창문을 넓히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 그 때까지 나는 매우 폐쇄된, 네덜란드의 보다 나은 지역 안의 부유한 사회에 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킬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그 후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제약 도매 회사에 다녔다. 나는 그 일이 그리 흥미롭진 않았지만  암스테르담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너무 답답   했다. 나는 비즈니스 과정을 하려고 런던으로 가기 위해 아주 간단한 통고를 결정했다. 네덜란드에서 받은 비즈니스 교육으로 인해 나는 그 과정이 어렵지 않음을 알았다. 나는 런던에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경이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 당신이 24세였나?


    그렇다. 나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나는 미국인 소녀를 만났었다. 나는 시카고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약국에서, 그녀의 도움으로  미국에 있는 연고자의 서류를 얻었다. 내가 미국에서 살고 싶다면 나는 여전히 스폰서를 찾아야 했고, 그래서 나는 Netherlands-American Foundation에서, 그들이 나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주말동안 가기로 결심했다. 그 특별한 주말에 그들이 모든 신청자들을 심의하는 임원회의가 있었다. 나는  적절한 서류를 가지고 적절한 시기에 갔었다. 1시간 후에 나는 받아들여졌음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6개월 전부터 그들의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었다.
     나는 미국에 1년 동안 있었는데 시카고에서 3개월, 그 후 덴버에서 얼마 간, 그 다음엔 뉴저지에서 보냈다. 나는 도이치 제약회사의 약 도매상이었다. 그 이후 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독일에 갔고, 겨우 내내 6개월 동안 뮌헨에서 지냈다. 이 회사에서 놀라운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내 나는 일 년 동안 네덜란드 본사에 있게 되었다. 그 회사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제약회사들 중 하나였다. 그 회사는 확장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리스로 보내졌다.
     나는 즉시 그리스에 친밀감을 느꼈다. 마치 나의 2번째 고향 같았다. 나는 아테네에서 경이로운 날들을 6년 동안 살았고 그 나라를 일주했다.
     그 후 나는 3년 동안 이란으로 전근 되었다. 나는 내가 많이 그리워 할, 그리스에 있는 토박이들과 많은 관계를 맺었다.
    나는 굉장히 폐쇄적이고 닫혀있는 이란을 발견했다.
      이란으로부터 약 6년 동안 아르헨티나로 전근 되어졌다. 페론Peron이 권력을 가진 시기였는데, 그리 평안하지는 않았다. 많은 유괴가 있었고, 또 비록 나의 이웃이 유괴 당했다 하더라도, 유괴 되는 것에 대한 위협을 나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보호 받고 있음을 느꼈고, 나는 그곳에서 머무르는 것을 즐겼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생활을 끝냈을 때 나는 44세였음이 분명하다.


    믿음과 보호받는 존재라는 느낌은 여전히 당신의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감에서 왔나?


     
    여전히 나의 아버지와의 교감을 통해서였다. 그 교감은 항상 나타났다. 물론 나는 나의 일에서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사업을 하기엔 어려운 시기였고 압박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를 편안하게 했고, 어쨌든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얻곤 하였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시기 아르헨티나의 상황 속에서 그 곳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해외 주재 인들이 느끼는 놀라움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음, 당신이 아는 것처럼, 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가족이 없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만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매우 재미있는 일을 가졌다. 그 일은 나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다. 여행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주었다. 금전적으로  무엇이든 걱정할 것이 없었다. 나는 매우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찾아야 될지 알 수 없다고 느끼는 나의 인생에서 뭔가 중요한 놓침이 있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 나는 그것을 찾으려 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영적인 방향에 있음을 알았다. 그 후 나는 브뤼셀로 이사했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다. 나는 어머니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오쇼의 겨자씨 The Mustard Seed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책이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그것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 전에 오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겨자씨The Mustard Seed가 그가 예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당신의 어머니는 기독교인 인가?


     
    나의 어머니는 기독교적 소양을 가졌을 뿐 대단한 자유 사상가였다. 그녀는 스스로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크리슈나무르티, 이슬람교 책들, 힌두교 책들을 계속 읽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오쇼를 읽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에 브뤼셀로 돌아올 때 그 책을 손에 넣었다.


    그 때가 언제였나?


    그 때는 1980년 이었다. 그 책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오쇼 센터의 주소가 있었으므로 전화를 해서 브뤼셀에도 센터가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있다고 말하고 주소를 주었다.
     나는 처음 그 집에 갔었던 때를 기억한다. 나는 계단을 조금 올라가야 했다. 나는 무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올라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오렌지색 예복을 입고 당신이 몸을 흔드는 일종의 명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쿤달리니(오쇼가 행한 명상)를 의미 하는가?


    그렇다. 나는 그 무리에 참여 했고, 옷을 오렌지색 예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들은 내가 쿤달리니를 하기를 기대했고, 그것은 명상에 대한 나의 개념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몸을 흔들고 춤을 추는 모든 것에 매혹되었었다고 기억한다.


    당신의 명상에 대한 개념은 어떤 것이었나?


    그냥 앉아 있는 것, 마치 수도승처럼 아름다운 평온한 환경 속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것.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경험했나?


    나는 그 명상 후에 매우 평온함을 느꼈고,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명상을 하기 위해 되돌아갔고 마찬가지로 매일 저녁 다른 경험들이 있었다.
     그 경험들 중의 하나는 환생이었다. 나는 환생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나는 뉴에이지 치료법으로 완전히 정화되었다. 내가 환생했을 때 나는 1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울었는데, 그것은 인생에서 행운을 얻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나는 내 안의 이 슬픔을 발견 하고는 놀랐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자, 이제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 할 시간이다.” 이것은 나를 푸네에 갈 결심을 하게 했다. 그때가 1980년 3월이었다.


    당신의 가족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


     나는 어머니께 전화해서 말했다, “내가 휴가동안 어디를 가려는지 맞춰 보시겠어요? 나는 푸네에 가려합니다.” 그녀는 그것이 대단한 농담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나의 경험이 될 것에 대해 마음이 끌렸다.
     나는 3주일 동안 푸네에 갔었고 명상모임을 했다.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3일 동안 단식을 했고 매우 평화로웠다.
    푸네에서 3주를 보낸 뒤 브뤼셀로 돌아가는데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내가 돌아 온 첫 날을 기억한다. 나는 나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내가 많은 일, 모든 책임감, 모든 경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을 계속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진실로 모든 것이 있는 것에 대해 찾기 위해 푸네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단시간에 결정했다. 나를 위해 푸네에 갈 시간이었다.
     나는 사장을 만났고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가와 내가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했다. 그는 매우 놀랐다. 그는 내가 최면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를 위해 매우 가치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일 개월, 최대 이 개월 동안 떠나기를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자유인으로서 가기를, 무엇이 일어나려는지 결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일을 포기했다. 나는 3달 동안 기다려야 했고, 그 후 바로 나는 푸네로 갔다.


    만약 내가 당신을 한순간 멈출 수 있다면. 당신이 당신의 일을 포기했다고 말할 때, 당신이 그것을 서술하고 있는 방법으로부터, 그것은 실제로 하나의 일보다 더 많았었다.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 되었다. 당신은 이십여 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었다.


    약 십육 칠년 동안. 정말 재미있었다. 나의 일은 중요했고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즐겼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너무 많은 어떤 경력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저절로 왔다. 나는 낮 동안에 나의 모든 힘을 쏟았으나, 밤에, 내가 사무실을 걸어 나왔을 때, 나는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성공을 위해 가진 않았으며, 저절로 왔다. 나는 여전히 진정한 노력 없이 , 내가 이러한 모든 지위들을 가졌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그에게 추천서를 주려고 중역에게 전화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너무 즐거워서 나의 사무실 주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당신은 자유의 참 의미를 느꼈다.


    자유에 대한 엄청난 의미, 또한, 내가 항상 원했었다고 생각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 결정이 나에게 그리 어렵진 않았는데, 그것이 단시간 내에 결정한 이유이다.  나는 생각해야할 가족이 없었으며, 금전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나는 “이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스스로를 위해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푸네에 간 이유이다. 푸네에서 몇 주를 보낸 뒤에, 오쇼 산야신(오쇼의 제자)가 되었다. 오쇼는 나에게 디안 파리슛다 Dhyan Parishuddha라고 이름 지어 주었는데, 이는 궁극의 순수를 의미한다. 그는 나에게 가능하면 많은 그룹들만큼 하라고 말했고, 나는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 후 나는 오쇼가 그 지역에 갈 때까지, 대신하여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쉬람에서 일했는가?


     그렇다. 나는 아쉬람에서 일하고 바깥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전에, 최면요법 훈련을 위해 카쉬미르에 있는 산토쉬와 함께 사람들의 집단에 참여했는데, 이는 정적인 상황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곳, 카쉬미르의 하우스보트에 살고 있는 약 70여명의 공동체였으나, 매우 원시적이고 대단히 철저한 식이요법과 오직 날 것만을 먹는 일종의 살아남기 위한 여행이었다. 질병이 많았다. 물은 좋지 않았다. 물은 호수에서 길어 와서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끓였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병이 났다. 많은 여행들이 계속되었다. 마지막에는 처음 출발했었던 사람들의 반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여행이 끝나고 나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나는 미국으로 되돌아 갈 수 있고 또 오쇼와 함께 있게 될 때까지 여전히 그 제자들의 무리에 가능한 오래 같이하기를 바랐다. 산토쉬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그는 내가 그 곳에 최면요법 (de-hypnotherapy)협회를 설립하는 데에 참여하기를 원하는가를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략 9개월 정도를 그곳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오레곤에 있는 새로운 오쇼 공동체에서 축제가 있었고 그것은 나를 보다 더 강렬하게 오레곤에 가고 싶게 했다.  탈 최면요법 협회에서 내가 미국에 가서 머무를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것이 결정되자마자 나는 오레건에 갔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래서 당신은 그 공동체의 거주자였다.


    나는 최후까지 거주자였다. 그 곳에 있게 된 바로 그것이 내게 놀라운 시간이었다. 나는 서로 다른 모든 종류의 일들을 했고 내가 그곳에 있었던 제일 마지막 날까지 매우 행복했다. 오쇼가 감금된 비디오를 보는 것은 나에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당신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는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것이 내가 그에게 대단히 감사하는 이유이다.
    그는 나의 마음을 열었다. 그것이 그가 나를 위해 했던 것이다.


    오레곤을 떠난 후 오쇼가 그 곳에 다시 거주했을 때 당신은 푸네로 갔는가?


    나는  오쇼가 인도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방문했으며, 봄베이에서 그의 달샨darshan(현존하는 성자의 존재)을 가졌다. 나는 그 기간 동안에 여러 번 그를 방문했다. 나는 그가 푸네에 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가능하면 빨리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을 그 때, 나는 갔다. 나는 예전에 느꼈던 것처럼 오쇼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으나, 새로운 오쇼의 제자들 가운데서나 또는 무엇이 계속되어지고 있는 집에서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항상 오쇼와 사랑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러한 감정을 점검하기위해 1년 뒤에 푸네에 돌아왔다. 그는 내가 본질적인 문제를 향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내가 오레곤을 떠나 네덜란드에 돌아왔을 때 나의 형은 내에게 그의 정원 돌보기를 제안했다. 그는 돌보지 않고 내버려둔 큰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다. 내가 조경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내가 그의 정원을 새롭게 단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졌다. 나는 정원 관리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 밖에 할 것이 없었으므로 형의 제안에 동의했다.  어느 저녁에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내 형의 집에 있는 한 산야신 남자를 만났다. 그는 그리 멀지 않은 비론에 있는 그의 구루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가 산야신으로 그의 구루, 비론에 있는 독일 남자, 에게 가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매사에 관심이 많은 나의 형수는 몹시도 그곳에 가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곳에 혼자서 가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내가 그녀와 함께 긴 시간동안 함께 갈 것을 강요했다. 결국은 나는 따라가기로 결심했고 첫 만남에서  내가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이 남자 알렉산더 스밋을 방문하기 위함인가?


     그렇다, 봄베이와 푸네에서 오쇼를 만난 후에 나는 알렉산더 스밋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는 니사르가다따 마하라즈(Nisargadatta Maharaj)의 제자였고 니사르가다따와 아주 짧은 시간동안 함께 한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삿상 (진리 안에서 만나는)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삿상이라 하지 않고 그냥 만남이라 칭했다. 그는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니살가다타의 책 “I AM THAT"을 읽을 때의 의미로써 많은 ”THAT"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아닌.


    당신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들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누구인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 1년 동안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음을 말해야한다. 여전히 나는 그에게로 와야 한다고 느꼈다. 5년 동안 오쇼와 함께 있은 후에 나를 무척 놀라게 한 것은,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단서를 하나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그것은 오쇼와 함께 한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단지 알렉산더와 함께 1년을 지낸 후에, 그것은 나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는 진실로 머리카락으로써, 내가 질문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나를 끌어 당겼다. 마침내 나는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푸네에 있는 오쇼를 2번째 방문했을 때, 그가 코레곤 공원 koregoan park에 다원대학(multiversity)을 세우는 일에 대해 말하였으며, 나는 ‘왜 당신은 당신의 주제에 충실하지 않느냐?’는 의아함을 가졌다. 나는 조금 실망했다.
     알렉산더와 함께 한 어느 저녁동안에 그가 참나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나는 ‘왜 오쇼는 나에게 이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했다. 나는 매우 슬펐고 오쇼와 함께하는 시기는 끝났다고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알렉산더와 코너를 돌아 10분이 걸리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알렉산더가 있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 어떻게 그가 그곳에 있는 일이 있었는지 놀랍다. 그래서 나는 지속적으로 그를 방문했다.
     내가 정원사로 있었기 때문에, 겨울에 3개월 동안 쉴 수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스리랑카와 인도를 종종 방문했다. 스리랑카에서 나는 규칙적으로 방문하는 매우 소중한 장소가 있었는데, 칸디에서 멀지 않은 곳의 명상 리트리트였다.


    이곳은 불교신자들이 운영하는 곳인가?


    아니다, 일반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아름다운 장소이다(beautiful setting).  그는  무엇이 당신이 수행해야할 명상의 일종인지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가 주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또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는 당신을 홀로 남겨 둔다. 나에게 그것은 귀중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나는 오쇼가 그의 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이것은 나를 매우 슬프게 했다. 며칠 뒤에 오쇼와 연관되어진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어느 저녁 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했다. 그들은 내가 오쇼와 함께한 나의 몇 년, 나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으며 그들은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 봤다. 이는 2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그 이후 완전히 끝났다. 그 순간부터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것은 진실로 나의 인생, 나의 아름다운 인생, 한 장의 끝이었다. 나는 그에게 굉장히 감사한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인생의 본질적인 중요한 부분이다.
     알렉산더는 나에게 지식을 주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알렉산더를 방문해오고 있다. 나는 그가 어떤 모임도 더 이상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도를 방문한 것 들 중의 한번은 마치 내가 어떤 장소들을 지시 받은 듯이 보였다.  스리랑카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암리타난다마이 아쉬람의 주소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아쉬람을 방문했다. 나는 그 곳에서 그 아름다운 사람에 의해 감동받았다.


    이곳은 남 인도에 있다.  아쉬람 그 곳은 섬에 있는가?


    그 곳은 하구원(역류하는 물)과 바다 사이에 있다.  나는 박티(헌신) 입문에 대해 들었었으나, 이것은 박티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실제 경험이었다.  나는 박티의 아름다움, 특히 암마에 의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이다; 그녀는 놀랍다. 나는 작년에 그녀를 처음 방문했다. 나는 6일 동안 머물렀다. 이번에 나는 약 10일 동안 그녀를 방문했다. 그녀는 그녀가 나타내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내가 보도록 했는데, 이것은 오쇼와  알렉산더와 함께 보고 경험한 것이었으나 이러한 형태는 아니었다. 잘 들어요, 그녀가 당신을 안을 때, 그녀는 여성이며, 어머니 모습이다. 그것은 별 문제로 하고, 그녀는 조건 없는 사랑의 화신이다. 그녀는 지금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나는  박티의 아름다운 길로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나의 길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았으나, 여전히 나는 암마와 함께 있기 위해 꼭 돌아가야 했다.
     올해 나는 나의 여행 일정에 파파지를 만나는 것을 넣었다. 나는 지난해 강가지가 네덜란드에 있었고 나는 그녀의 삿상에 세 번 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명백함에 의해 감동 받았다. 그녀의 스승이 여전히 살아 있고 그가 83세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보다 서둘러서 내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그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3주일 전에 럭나우에 도착한 이유이다. 나는 예전에 그에 대해 들었으나, 더 말하자면 많은 오쇼의 제자들이 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파파지를 만나고 싶어 하게 한 것은 강가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가 직접적으로 그 길을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것은 나에게 매우 분명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파파지다.


    당신은 3주 전 첫 번째 삿상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나는 그 곳에 있어서 행복했다. 나는 더 많이 머물렀고, 더 많이 상가(Sangha)에 일체됨을 느꼈다. 나는 그와 함께 앉아 있고 싶었다. 물론, 당신이 떠날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당신은 안다. 그렇지만 아무런 의문도 없었다.
     그 때 나는 그 당시 책에서 읽고 있던 것을 근거로 하여 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 의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참나를 깨달을 가능성에 관련 되어 있었다. 나는 늘 ‘그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의문이 항상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의문이 깨달음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나는 의심했다.
     나는 파파지에게 그 의문이 올라왔는데, 놀랍게도, 그는 직접적이지만 점차적으로 나에게 그 의문은 단지 하나의 의심일 뿐임을 알게 해 주었다. 이 생각은 마음속, 이것 ‘나’에 들어 왔고, 그는 그것이 있는 곳을 바라보게 했으며, 갑자기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이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과묵해서 놓쳐버렸을 것이다. 놀랍다. 나는 여전히 아찔하다. 스승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이러한 경험을 묘사할 단어를 찾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나는 평화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낀다. 당신은 바로 그것임을 안다. 그것은 매우 귀중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그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왔고 이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차라리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으나, 당신은 그것에 대한 감동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것은 파파지의 선물이었다. 내가 암스테르담에 되돌아갈 때 나는 알렉산더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이 순간을 그를 위해 회상해야 한다.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알 것이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난 이래로, 나는 당신에게서 ,당신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에서, 당신의 전 생애를 표현하는 방법에서, 그리고 당신이 이 경험을 네덜란드에 있는 당신의 스승을 어떻게 회상하게 될 젓이란 것에서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겸손을 느꼈다. 대부분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있다.


    그럼, 나는 그것이 굉장히 놀랍도록 단순해서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만약 파파지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았다. 나는 그것이 오묘한 존재라고 여긴다. 나는 감사로 가득 찼다(눈물 흘린다).
     재미있게도, 이 시점으로 내 인생이 이끌려온 것처럼 보인다. 바로 그 시간과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만났던 사람들. 그것이 내가 느낀 것이다. 내 생애 전부가 인도되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일찍이 당신의 일생을 통하여 어떻게 당신이 항상 존재자로서 어떤 특별한 길을 가진 것을 느꼈다고 묘사했다.


    물론 나는 그것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다.


    당신의 생애에 대한 당신의 묘사를 통해 오는 위대한 신뢰의 느낌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직관 또는 무엇이든, 돌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고 나는 그냥 따랐다. 나는 항상 나의 중요한 단계들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고, 비록 그것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한 것이 옳았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여분의 한 주를 가졌었고, 나는 럭나우에서 머무를 한 주가 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하게 쓰일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 나는 2월 말에 네덜란드에 이미 돌아왔었으나, 당신이 떠나기 전에  당신의 일정에 맞추어야 했고, 이번 여행에서 나는 3월 초에 돌아오도록 나의 스케줄을 정했다. 나를 위해 이번 주가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당신은 다음 순간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이 순간에 모르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나에게 준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웃는다). 나는 전혀 모른다. 다만 내가 모든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기 위해 알렉산더를 만나러 돌아가고 싶다는 것을 알 뿐이다. 파파지와 강가지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있으며, 나는 알렉산더를 향한 나의 사랑에 대한 어떤 대립도 없음을 안다.


    파파지가 한번은 나에게 니사르가다따의 가르침이, 라마나 마하리쉬로 부터 온, 그 자신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니사르가다따에 의해 쓰여 진, 나는 그것이다(I Am That)는, 경전이다.
     나는 파파지의 나이로 보아 그 곳에 많은 시간이 남겨져 있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되돌아가고 싶었다.


    여기로 돌아 온 당신을 만나서 좋았다.  나의 집에 당신이 나를 돕는 것을 좋아할 정원이 있다.


    아, 나는 정원사로서 전임되어 있다.  그렇다,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나의 소유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장소에서 산다. 나는 어떤 문제도 없고, 나는 그것을 즐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때에 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인생은 너무 관대하여 나는 때때로 두렵다.


    당신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의 일본에서의 삶과 매우 단순하고 겸허한 선승들의 생애로부터 알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음을 느낀다. 평범하지만 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미에서. 여기에 앉아서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나에겐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렇다. 오늘 오후, 그것은 선물이었다.

    p165
     마음은 그것을 만지거나, 그것에 도달하러 갈 수 없다.
     

    p166
     참나에 대한 은총은 자유를 위한 욕망을 일으킨다.
     신의 은총은 당신을 구루에게로 데려간다.
     구루의 은총은 모든 의심을 없애고 오직 자유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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